이원론적 대립을 통해 살펴본 페르디두르케

2010. 4. 28. 23:11Life/Culture

페르디두르케 - 비톨트 곰브로비치


페르디두르케
1. 도입
 곰브로비치의 ‘페르디두르케’는 여러 가지로 독특한 소설이다. 제목부터 시작해서 주제, 서술 방식 그 어떤 것도 평범하지 않다. 처음엔 자신의 무의식에 숨어 있던 어린 시절의 자아의 껍데기가 눈 앞에 보이는가 싶더니 또 어느 순간엔 전혀 말도 되지 않는 총합주의자 필리도프 교수와 필리베르 후작이 등장하고 결국 마지막엔 자신의 친척인 조시아를 납치한다. 일반적인 소설에 대한 이해를 갖고 접근하였을 때는 너무나도 무질서하고 완성되지 않은 퍼즐 조각처럼 알 수 없는 이와 같은 괴상함은, 하지만 결코 이 소설이 가치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무의미해 보이는 일련의 글들이 모여서, 끼어들어서 그것이 또 다른 하나의 새로운 소설을 만들어 간다. 아니, 어쩌면 「어린이며 아이인 필리도프」 서문에서의 이야기처럼, 부분들이 전체를 이루려 하거나 혹은 시작과 끝의 둘 사이에서 중간은 저절로 창조되는 것이거나 혹은 절대로 전체를 창조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도 아니라면 소설을 만드는 작가가 아닌 이 글을 읽는 독자가 새로운 창조자일는지도 모른다.
 ‘페르디두르케’는 유죠라는 삼십 대의 소설가가 겪는 꿈 같은 이야기이다. 작가는 이야기의 전반에 걸쳐서 ‘미성숙’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자신의 ‘미성숙’을 깨달은 주인공이 어느 순간 갑자기 아이가 되어 버리고 핌코라는 고상하고 학자연하는 훈장으로 묘사되는 인물에게 이끌려 다시 학교로 돌아간다. 그 후로 학교, 집, 이모네 집의 공간으로 이동하며 펼쳐지는 이야기는 순진함, 교육, 현대성, 성, 계급 등의 요소가 중심이 되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이 요소들은 하나의 판단 기준으로 작용하고, 그 자체가 또 다른 상반된 개념과 대립함으로써 여러 방식에 의해 이분법적으로 양분된 세계를 보여준다. 여기에서 작가는 몇 가지 큰 대립적인 요소들을 제시하는데 앞에서 이야기한 미성숙과 성숙의 대립, 청년과 건달의 대립, 선생님과 학생의 대립, 현대성과 늙음의 대립, 귀족과 천민 혹은 주인과 하인의 대립이 바로 그것이다. 이 감상문에서는 작품에 드러나는 이런 대립적인 요소 몇 가지를 중심으로 ‘페르디두르케’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하려 한다.


2. 미성숙
 ‘페르디두르케’란 소설에서도 곰브로비치란 작가에게서도 떼어 놓을 수 없는 단어가 바로 ‘미성숙’이다. 작가 스스로도 말년에 “미성숙은 나의 구호가 되었다.”라고 말할 정도인 이 미성숙은, ‘페르디두르케’라는 소설 전체에 걸쳐 드러나고 있는 이미지이다. 그렇다면 미성숙이란 무엇일까? 글자 그대로 생각하자면 성숙하지 못한 상태이다. 흔히 미성숙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림’ 혹은 ‘젊음’의 상태를 생각하기 쉽다. 나이가 들어 ‘어른’인 상태가 되면 그와 함께 자동적으로 성숙이라는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한 인간이 자라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결코 미성숙을 벗어난다는 것과 같은 개념이 아니다. 소설에서도 드러나듯 성숙하지 못한 어른들도 수 없이 많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내가 알지 못한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다’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자신이 미성숙한 상태라는 것을 깨우치는 것에서부터 성숙의 상태가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유죠는 어느 날 다시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는 꿈을 꾼 후 잠에서 깬다. 서른 살이 넘은 자신이 풋내기인 자신을 비웃고 그 예전의 자신 또한 현재의 자신을 흉내내며 비웃는다. 그러다가 문득 ‘나는 과연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품게 된다. 그는 자신을 중요한 인물로 생각하는 사람들과 자신을 성숙하지 못하다며 비난하는 문화계의 여자들과 어정쩡한 지식인들 사이에서 이중의 ‘나’를 경험한다. 이 부분은 한 개인이 성숙과 미성숙의 잣대에서 얼마만큼 자유로울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구분에 있어서 과연 절대적인 기준이 존재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글에서도 드러나듯 곰브로비치의 처녀작인 「미성숙한 시절의 회고록」이라는 작품은 발표 당시 폴란드에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소설에 드러난 ‘어정쩡한 지식인’과 같은 표현들은 자신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비난하는 불특정 다수에 대한 표현인 것 같다. 어찌 되었든 그는 미성숙이라는 주제를 던졌고 그로 인한 완전히 상반된 평가에 의해 성숙과 미성숙의 자신으로 분리된다. 하지만 이는 비단 곰브로비치 혹은 유죠에게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어쩌면 모든 사람은 하나 이상의 미성숙성을 지니고 있다. 물론 이 문제는 나이에 비례하는 문제는 아니다. 주변에서 흔히 사용하는 애 어른이니 나이 값을 못한다느니 하는 말만 봐도 알 수 있다. 성숙이라는 것은 한 마디로 정의 내릴 수 있는 절대적 개념이 아니다. 예를 들어 ‘걘 참 성숙한 아이야.’라는 말을 했을 때 그 상황을 알지 못한다면 성숙이라는 단어가 정확히 그 아이의 어떠한 특성을 가리키는 것인지 알아내기 힘들다. 생각이나 사상의 성숙, 신체적이고 성적인 성숙에서부터 시민의식의 성숙, 민주주의의 성숙, 내면의 성숙 등 수 없이 많은 상황에서 우리는 성숙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이것들이 모두 하나의 의미를 지칭하는 것은 아닌 이유이다. 성숙이라는 것은 어쩌면 완성된 하나의 개념이 아니라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저 멀리 떨어진, 그래서 평생을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만 하는 것이고, 오히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비교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상대적인 개념인 것이다.


3. 학교 교육과 아이들의 순진함, 그리고 낯짝
 앞에서 이야기한 미성숙의 문제가 내면의 문제라면 앞으로 이야기할 교육의 문제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사회적인 문제이다. 학교라는 장소, 단순한 하나의 장소가 아닌 아이들의 교육을 지배하는 이 곳을 풍자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그는 구태의연한 교육제도를 비판한다. ‘페르디두르케’에 표현되는 학교의 모습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학교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모든 아이들이 운동장에 모여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 뒤 벽을 보면 학부모들이 학교 벽의 작은 구멍으로 실눈을 뜨고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있다. 그리고 아이들의 순진한 모습을 보면서 흡족해한다. 하지만 정작 아이들의 대화는 순진함과는 전혀 무관하다. 온갖 욕설과 외설스러운 말들이 난무하고, 자신이 순진한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들은 더더욱 험한 말을 지껄인다. 또한 교육자라는 단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선생님들은 학생을 순진한 멍청이로 만드는 목표를 갖고 말도 되지 않는 이유를 덧붙여 라틴어 격변화, 위대한 시인만을 강조한다.
 학교의 장면에서는 건달과 청년이라는 요소가 서로 대립한다. 건달의 대표격인 미엔투스와 청년의 이상을 대표하는 쉬폰이 서로의 이상을 위해 싸운다. 아이들다운 순수함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쉬폰에게 미엔투스는 ‘인상쓰기’라는 결투를 신청하고 미엔투스는 결투에서 패배한 쉬폰의 귀를 범한다. 이것으로 청년의 이상은 무너진다. 인상쓰기라는 결투에서 미엔투스는 흉하게 일그러진 ‘낯짝’이라는 전리품을 얻게 된다. 낯짝은 하나의 가면이다. 모든 사람은 가면을 갖고 있다. 자신의 내면에서 웅크리고 있는 본질적인 모습, 그리고 본질을 감추기 위해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낯짝. 가면으로 본질을 가리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진정한 소통을 갈망한다. 이 낯짝은 성숙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존재한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미성숙을 감추기 위해 사람들이 쓰는 가면도 바로 이 낯짝인 것이다. 유죠 또한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겨난 가면과 내면의 자아 사이의 불균형, 그리고 미성숙에 끊임없이 저항하지만 번번히 실패한다. 이런 이유로 그는 결코 이 상황을 벗어나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


4. 현대성과 성
 핌코가 학교를 마친 유죠를 데리고 오는 곳은 바로 므워드지아코프네 집이다. 이곳은 지극히 현대적인 므워드지아코프 부인과 남편인 기사, 그리고 젊음에 현대성이 곱해져 지극히 현대적인 여고생이 사는 집이다. 핌코는 유죠가 그 여고생을 사랑하도록 만들어 그를 영원히 청년기 속에 가둬두려 한다. 여고생은 핌코와의 정반대에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등장하는 것이 장딴지이다. 장딴지는 아마도 일종의 성의 상징으로 보인다. 드러내 놓고 성을 표현하는 현대 젊은이들과 겉으로 드러낸 미끈한 장딴지를 연관 짓는다. 유죠와 주트카의 첫 만남에서 핌코는 주트카를 스포츠를 좋아하는 현대적 여고생으로 묘사하며 장딴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이 순간부터 모든 것은 장딴지와 연결된다. 므워드지아코프 부인은 전후의 현대성의 찬미자이다. 항상 이런 저런 위원회에 참석하는 그녀는 모든 것을 현대성 혹은 현대적 젊은이의 특성으로 연관 짓는다.
 “시대가 그런걸요, 교수님. 시대가 그래요! 교수님은 지금 세대를 모르시는 겁니다. 풍습에 일대 혁명이 일어난걸요. 폭풍이 몰아치고, 땅이 흔들리고, 우리는 바로 그 가운데 있답니다. … 모든 것을 다시 건설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오래된 곳은 모두 무너뜨리고 현대적인 것들만 남겨두어야 해요.”
 이와 같은 부인의 말은 이런 현대성에 대한 비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모든 것은 시대라는 이름 아래 현대성으로 이해되고 이런 현대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혁명의 가운데에서 벗어난 자들이다.
 “그래 물론 나쁠 건 없지! 주트카. 사생아를 낳아도 좋다면 마음대로 해라. 그게 뭐 나쁠 거 있겠니? 처녀성을 칭송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 이제 더 이상 처녀성을 숭배하지 않는단다. 그건 과거에서 풀려나지 못한 자들이나 하는 짓이지.”
 이와 같은 주트카 아버지의 말 역시 마찬가지이다. 구시대의 가치를 중시하는 자들은 모두 과거에 얽매여 있는 자들이 되어 버린다. 작가는 이 현대적인 가족의 일련의 행동들을 통해서 과거의 그것과는 너무나도 달라져 버린 현대의 생활 세태를 우스꽝스럽게 비판하고 있다. 결국 이 가족은 주트카의 장딴지로 인해 집으로 이끌려 온 현대적인 남학생 코피드라와 늙은 훈장 핌코에 의해 우스꽝스러운 결말을 맡게 되고 유죠는 드디어 핌코로부터 탈출하게 된다.


5. 계급
 미엔투스와 함께 길을 떠난 유죠는 정처 없이 머슴을 찾아 떠난다. 그들은 도시 여기 저기를 떠돌다가 교외로 나오게 된다. 미엔투스는 사람들을 보며 ‘여긴 시골이 아니야. 학교와 똑같아.’라 말한다. 그들은 점점 더 변두리로 발길을 옮기고 결국 둘은 인적이 없는, 간혹 개 짖는 소리만이 들리는 길을 걷게 된다. 이상하게 생각한 그들은 한 집에 들어가는데 그곳에 있는 것은 인간의 모습을 한 개다. 그 농부 개들은 진짜 개처럼 물고 뜯고 짖는다. 도시 지식인들 그리고 권력자들의 공격을 피하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이빨을 키우고 물어뜯다가 결국 진짜 개가 되어 버린 것이다. 유죠와 미엔투스를 공격하는 그들 앞에 갑자기 후를레츠카 이모가 나타난다. 이모는 반갑게 아는 척을 하며 유죠를 안고, 이모가 그를 안음으로써 아이가 되어 버린 유죠를 본 농부 개들은 순식간에 다시 농부로 돌아가 웃음을 터뜨린다. 권력자가 아닌 어린 아이는 결코 그들이 경계 해야 할 대상은 아닌 것이다.
 유죠와 미엔투스는 이모의 집으로 가는데 거기서 미엔투스는 그토록 찾던 머슴을 발견한다. 한번도 얼굴이 된 적이 없는 낯짝을 가진 머슴이었다. 미엔투스는 그와 형…제가 되기로 결심하고 그에게 따귀를 맞는 방법을 통해 그와 형…제가 된다. 미엔투스는 볼레크와 형…제가 되기 위해서 그와 평등해져야 했고 그와 평등해지려면 그가 유죠에게 따귀를 맞았듯 미엔투스도 따귀를 맞아야 했다. 그렇게 미엔투스와 볼레크가 형…제가 되면서 여러 에피소드가 발생한다.
 “착한가? 맞다니껴. 우리 피를 빨아먹는 걸 보면 착한게 맞다니껴. 우리 마을엔 먹을 게 하나도 없다니껴. 전부 가난한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는다니껴.” “가끔씩 때리는 건 나쁘지 않아.” “낯짝을 갈기는 건 아주 바람직해.” “상대의 낯짝을 갈기는 것 같은 일은 또 없을걸!” 유죠가 이모의 집에 머무는 동안 이런 식의 대화가 빈번히 나온다. 또한 ‘오랜 세월 동안 이어져 내려온 위계질서는 바로 영주들이 몸의 부분들을 지배하고 있다는 데 근거를 둔 것이다. 그러니까 주인의 손은 하인의 낯짝과 같은 높이에 있고, 나리의 발은 농부의 몸 중간에 있어야 한다는 엄격한 봉건적 체계에 따른 것이다. 이런 위계질서는 태곳적에 시작된 것이다…’ 라는 묘사에서도 하인과 주인의 관계가 잘 드러난다. 폴란드는 실제로도 봉건의 해체가 뒤늦게 일어난 나라이고 19세기에도 아직 봉건의 잔재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우스꽝스러운 상황이지만 이 상황을 통해서 그는 시대적 현실과 계급에 관한 인식의 문제를 비판하고 있다. 결국 주인이나 하인이나 모두 미성숙의 문제에 사로잡혀 있고 주인의 그런 모습을 하인은 모두 곁에서 관찰한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가면을 쓰지 못하는 주인들의 미성숙이 드러남의 반작용으로 주인과 하인의 계급을 나누고 그들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의식을 가진 것은 아닐까?


6. 필리도프
 ‘페르디두르케’를 읽으면서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던 부분은 바로 중간에 삽입된 「어른이며 아이인 필리도르」와 「어른이며 아이인 필리베르」이다. 총합주의자인 필리도르 박사와 안티-필리도르로 불리는 분석주의자는 서로를 공격하고 무너뜨리기 위해 싸운다. 역시 ‘인상쓰기’ 만큼이나 이상한 방식으로, 필리도르는 모든 것의 총합을 이야기하고 안티-필리도르는 모든 것을 분해한다. 몇 번의 결투 끝에 그들은 목적을 잃어버린 채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다. 그리고 필리도프는 이렇게 말한다.
 “뭐든 뒤집어 보면 다 어린애랍니다.”
 전체와 부분의 대립은 성숙과 미성숙의 대립과도 연결시켜 볼 수 있다. 작품의 첫 부분에서 유죠는 몸의 일부분이 어린 시절의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 그의 몸은 각 부분이 따로 떨어져 날뛰게 된다. 필리도프의 이야기에서도 필리도프의 부인이 분석주의자에게 공격 당한 후 몸의 각 부분이 따로 떨어진 것처럼 떠돌게 된다. 이는 성숙과 미성숙 사이의 일종의 괴리가 일어난 것이다. 스스로 성숙한 성인이고 하나의 개체라고 생각하는 대상을 철저히 분석하고 세분화 함으로써 하나의 부분에 지나지 않았던 미성숙은 전체를 지배하게 되고 결국 자신이 미성숙 그 자체로 변하게 된다. 앞서 이야기 했지만 모든 사람들은, 성숙 하다고 생각하는 그 자신 속에 내제된 미성숙을 갖고 있다. 이런 미성숙을 감추기 위해서 사람들은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가면을 쓴다. 하지만 철저히 분석 당하고 가면이 벗겨지면 그때부터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미성숙이 눈을 뜬다. 이런 미성숙은 한 개인을 지배하고 미성숙에 지배당한 인간은 현실에서의 미성숙과 이상에서의 성숙 사이에 괴리를 느끼게 된다. 하지만 가면 속의 인간은 미성숙을 숨기려는 욕망과 함께 본질을 드러내려는 욕망 또한 함께 지닌다. 필리도프는 안티-필리도프와의 최후의 결전을 통해 모든 것을 잃게 되고 모든 것을 뒤집어 엎고 가면 역시 사라진다. 가면을 잃은 그는 내면의 본질을 보여주려는 욕구를 충족하게 되고 여기서 성숙과 미성숙의 괴리는 사라진다. 이로써 필리도프는 어린애로 되돌아가게 된다.
 이 대립은 형태라는 측면에서도 생각해볼 수 있다. 몸의 각 부분과 몸 전체, 소설의 각 부분과 소설 전체, 그리고 그 외의 수많은 것들의 각 부분과 그 전체. 사실 부분과 전체는 동일한 것이다. 부분은 전체에 속하고 전체는 부분을 포함한다. 결국 전체와 부분의 본질은 동일한 것이고 단지 그들을 구분 짓는 것은 하나의 형식이다. 그는 이런 우스꽝스러운 대결을 통해서 우리의 현실 속에 있는 수 많은 형식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미성숙의 세계는 형식이 필요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면 되는 것이고 그건 어쩌면 순수의 세계라고도 할 수 있다. 가면이 없는 세계이다. 그러나 가면으로 가득한 성숙의 세계는 또한 형식의 세계이다. 이 세계에서 개인은 형식을 따르기 위해 수 많은 가면을 쓰고, 결국 스스로 만든 형식에 속박된다.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을 이야기하려 함이었던 것 같다. ‘페르디두르케’는 형식이 없이 뒤죽박죽 섞여 있다. 그리고 미성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