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또 이란전.

2010. 9. 7. 23:52Life

 2009년 6월 17일은 대한민국 대 이란의 축구 경기가 있던 날이다. 1:1로 비겼던 경기. 나에겐 잊을 수 없는 날이자 잊을 수 없는 경기이기도 하다. 작년 그 때 난 혜진이와 신촌 면가요시 - 요시라멘 - 에서 간단한 식사와 함께 맥주를 마시며 이란전을 보고 있었다. 몸이 이상하긴 했지만, 다음날 아침 병원으로 실려오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내게 6월 17일은 그런 날이다. 내가 다른 이들과 같았던 마지막 날이랄까.

 요즘은 정말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한다. 장애인에 대한 인식도, 그들을 위한 시설도. 다행히 난 회복할 수 있는 장애가 생겼고 지금은 상당히 회복되어 혼자 지하철을 타기도 하고 고속버스를 타고 놀러 다니기도 한다. 힘들어서 오래 걷진 못하지만, 남들처럼 뛸 순 없지만, 사람이 많은 지하철 환승역 계단을 올라가기 위해 지팡이와 난간에 몸을 의지해야 하지만, 어쨌든 난 걸어다닌다. 또 그만큼 시설이 갖춰져 있다. 특히 수도권은 넓은 지하철 망과 함께 대부분 역이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가 있어서 움직이기 편하다.

 내가 겪은 1년 이상의 시간이 유익했다거나 좋았다거나 행복했다고는 할 수 없겠지. 그렇게 이야기한다면 거짓말이다. 그렇지만, 내가 만난 친구들, 동생들, 형들, 아저씨들에 비하면 참 행복한 편이다. 나름대로의 생활에 익숙해져가고 있다. 그런데 요즘 약간 걱정도 된다. 치료를 마쳤을 때 서른이 다 된 나이에 다시 학교로 돌아가야 하고 - 뭐 어차피 학기를 마쳐서 한 과목만 들어도 졸업은 된다 - 졸업 후 취업 활동도 해야 하고 돈도 벌고 가정도 꾸리고 등등. 할 일은 많고 하긴 싫다.

 지난 1년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걸까? 누구에게?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아이가 되어 버린 기분이다. 기억력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예전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기억했는데 요즘은 쉽게 잊는다. 꿈을 꾸는 일이 거의 없다. 밤에 꾸는 꿈이 아니라. 중요한 무엇인가를 놓고 온 기분. 심장이 다 타버린 것 같은 기분? 술을 마셔도 들뜨지 않는 느낌. 1년 5개월째 멀리한 담배 연기가 입안을 도는 상상을 할 때가 있다. 흡연자라면 무슨 이야기인지 알 것이다. 조용한 겨울 밤, 종이가 타는 소리와 함께 입 안을 맴돌다가 이내 가슴을 가득 채우는 그 느낌.

 오늘 이란전은 대한민국의 패배다.

 입원한 이후로 기대되는 공연과 전시회를 참 많이도 놓쳤다. 램브란트, 척 맨지오니, 게리 무어, 제프벡, 퓰리처 상 수상 사진 뭐 그 외에 생각나지 않는 것들이 정말 많지만, 왜 게리 무어나 제프 벡은 내가 병원에 있을 때 첫 내한 공연을 했나 싶기도 하고.

 약간 힘들어졌다. 아니, 감상적이 됐다고 해야 할까? 약해졌다. 질린 것 같기도 하고 의지가 부족한 걸까? 귀찮은 것 같기도 하다. 오페라의 유령을 보고 잘까 그냥 잘까 고민이다. 책 읽기 영화 보기 음악 듣기 다 좋지만, 언제나 내 생각을 드러내는 건 어렵다. 세살 버릇 여든 간다더니 어릴 때 싫더 독후감, 음악 감상문, 영화 감상문은 지금도 어렵고 싫다. 그냥 나중에 내가 그 작품에 대한 예전의 감정을 궁금해하지 않을까 해서 5개에 하나는 기록으로 남기려 한다. 잘 안되지만.

 난 상상하는 걸 참 좋아한다. 글에선 논리가 중요하지만, 상상에선 그 누구도 내 논리를 지적하지 않는다. 맞춤법 띄어쓰기를 틀려도 되고 비약도 OK다. 설명할 때처럼 비유를 들 필요도 없고 주석이나 레퍼런스도 필요 없다. 그렇지만, 상상을 글로 옮기는 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다. 그래서 작가들이 참 대단해 보인다. 작가, 감독 - 창조자.

 와, 오페라의 유령 OST를 듣는데 정말정말 영국 발음이네. 거의 호주 사람같다. 아, 2분 45초 부근부턴 내가 아는 크리스틴이 나오는구나. 이런 음악을 이어폰으로 들어야 한다니 좀 아쉽다. 어쨌든, 이란전 때문에 기분이 참 이상해졌다. 정신을 못 차리겠네. 아, 크리스틴.. 맛있는 캔맥주 10개쯤 쌓아놓고 밤새 마시고 싶다.